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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주시는 시련보다 크다
by Abigail Dodds2024-01-0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 오래되고 진부한 이 말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살면서 하나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신 게 분명하다고 여러 번 느꼈다.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으로 인해 임사 체험까지 한 아들을 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가? 무력함? 만성통증? 어쩌면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을 견디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옆방에서 구급대원들이 발작하는 아들을 치료하는 동안 땀에 젖어 기절한 채 욕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사자와 우리의 한계


“갤럽, 브리, 뛰어. 너희는 군마라는 사실을 기억해”(The Horse and His Boy, 270). 자신의 조국 칼로르멘의 악을 피해 도망친 어린 공주 아라비스는 말하는 말 브리에게 적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7권 중 하나인 말과 소년(A Horse and His Boy)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리와 친구 흐윈(Hwin)은 각자 나름 생각하기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거 같다. “확실히 두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리고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


말하는 두 마리의 말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의 필사적인 질주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포의 정점을 향해서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은 칼로르멘 군인들로 이루어진 끔찍한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이에서는 더 위험한 적인 위대한 사자가 바로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271). 동화 속 이 단순한 장면이 지난 십 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어려움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2)어려운 시기에 나를 짓누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3)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짓누르기로 선택하셨는지와 관련해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욕실 기절 사건에 적용하기


브리는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등에 태우고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내 경우에는 위기를 맞은 아들과 필사적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어버린 끔찍한 생리 반응을 어떻게 사자를 등에 태우고 속도를 더 내는 브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비슷한 게 없다. 하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나는 나만의 새로운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거기 누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간구했고, 동시에 주님을 더 믿기 위해서 내게는 새로운 변속 기어가 필요했다. 내가 매 순간 아들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계셨다. 나는 아들의 발작을 멈출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내가 따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 곁에도 계실 것이다. 브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내 생각에 괜찮다 싶을 정도만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게 대단한 믿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다 감당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추격과 함께 나는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창조자이자 유지자가 아니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한계를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한계를 넘어서 


우리는 모든 걸 다 바쳤고,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안 돼, 이건 내 한계를 넘은 거야, 이런 손해는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시험은 말도 안 돼, 난 이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압력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


알다시피, 고난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믿음이 우리가 원래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건 내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수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의 길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그분을 의지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음을 종종 보여주신다. 그리고 직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단지 격려나 긍정적인 사고 또는 확언을 통해서 우리를 그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브리의 경우처럼 고통과 시련을 증가시킴으로,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서 달려나가도록 인도하신다. 


브리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자, 위대한 사자는 그들과 그들을 쫓는 진정한 적들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했다. 아슬란이 그들을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고 선한 일에만 복종하게 하실 뿐, 필요 없는 고통은 단 한 방울도 더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신다(롬 8:28-29).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라 질주하고 숨에 헐떡이도록 몰아가실 때, 그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이다. 그분은 오로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우리를 압박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옛 적들,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 사이에 거리를 두심으로써, 정말로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당신이 위대한 사자의 압력을 받는다고 느낄 때 결코 잊지 말라. 그의 모든 길은 변함없는 사랑이다(시 25:10). 화장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원제: More Than Mom Can Bear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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